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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자료실
[비우당]
낙산의 동쪽 비탈에 비우당이라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비우당(庇雨堂)은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집으로,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지었다고 한다. 비우당은 아주 작은 초가집으로,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다. 본래 비우당은 이수광의 외가 쪽 5대조인 유관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한다. 유관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사람으로 당시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선초 삼청(鮮初 三淸:조선 초 세 명의 청백리)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죽자 세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흥인지문으로 나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청백리 유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집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펴고 지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산이 없는 집은 비가 오면 어찌 견디겠소?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욕심없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 일화로 당시 이 터에 있던 집을 우산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이수광의 아버지가 집을 물려받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이수광이 다시 짓고 비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비우당(庇雨堂)이란 근근이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이다. 이수광 역시 청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 한다. 이수광이 죽은 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수광과 비우당의 청빈함을 배우기 위해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과거 때가 되면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이 비우당을 찾았다고 한다. 비우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비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계천의 다리 이름이 비우당교라 불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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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동샘]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이 자주동샘이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정순왕후는 15세에 단종과 혼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삼촌이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육신의 난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는데 이때 정순왕후의 나이 18세였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청룡사 부근에 정업원이라는 초가를 짓고 천에 염색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그때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했는데, 빨래를 하기만 해도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샘을 자주동샘이라 부르고, 이 일대를 자줏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주동샘 옆의 바위에는 한자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세조는 정순왕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정업원 부근에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지만 정순왕후는 끝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정업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 60년을 넘게 정업원에서 머물다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룡사]
이 낙산 부근에는 정순왕후의 흔적이 더 남아 있다.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그리며 매일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았다는 동망봉이 있고, 정순왕후가 불가에 귀의했던 절 청룡사도 있다. 청룡사에는 지금도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이 있다. 이는 영조가 친히 글을 썼다는 영조의 친필 비석으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정업원 옛터라는 뜻이다. 영조는 단종을 위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는데, 이 청룡사에 와서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 자리가 이곳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정업원구기비는 청룡사 화장실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볼 수 있다. 비각 안에 있어 비석을 볼 수는 없다.
또 동대문 밖 청계천에 영도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에도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정순왕후도 궁을 떠나 이 영도교까지 같이 온 뒤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다시는 단종을 만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또는 영도교(永渡橋)라 불렀다고 한다. ‘영도(永渡)’라는 다리 이름은 영원히 건너갔다는 뜻이라 한다.
또 예전에는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다녔던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장도 정순왕후와 관련이 있다. 정순왕후가 청룡사 부근에서 곤궁하게 살자 부녀자들이 채소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정순왕후를 찾는 부녀자들이 늘어나자 조정에서 이를 금지시키자 부녀자들이 영도교 부근에서 아예 채소를 팔다가 몰래 정순왕후를 찾아가 채소를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생긴 시장이 바로 금남의 채소시장이라 한다.

